오랜만에 듣는 9시수업이다. 지겹도록 지겹고 졸립도록 졸립다. 이상한 억양의 교수의 강의력은 썩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턱을 괴고 멍하니 앉아 있는 나의 태도도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많지 않은 학생수가 맘에 들었고 까다롭지 않을것같은 교수의 느낌이 좋았다. '뭐 이정도면'이라며 참아주고 받아들일만했다. 사실 교수의 강의력을 탓할수만은 없었다. 뭐니뭐니해도 내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으니까. 전력이 어쩌구, 옴이 뭘했고 따윈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어제의 침묵에, 나름 친구의 가르침에 따라 연락을 안했다만은, 연애에 소심한 나는 그것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떻게 시작한 연락이며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놈의 이야기라 나도 꾹참으며 받아들였지만 내심 그런 기술력을 자랑할만한 위인이 아니기에 내 방식대로 하고 싶었다. 예전엔 그랬다. 내 방식이 있었고 그때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당차게 나 신념대로 연애를 풀어나갔다. 그래서 크게 실패를 했고 많은 연애를 해보지 못했던게 아니냐 이야기 할 수도 있었겠지만, 좀더 정확하게는 어린 나는 연애에 많은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뭐 그땐 그때라고 치지만 좀 더 컸을때, 아마 작년 이맘때쯤이 아닌가 싶다. 또 다른 인연이 생겼고 나는 조금은 다듬어 졌지만 아직도 거칠은 나만의 연애 방식을 고집했고 어느정도는 효과를 발휘했지만, 결국 그녀도 나도 더이상은 버티지 못했다. 그것이 한계라는 것을 나는 깨닫게 되었고 그 후로는 조금은 다듬어서 하리라 마음먹지 않았다면, 난 필히 어제도 연락을 했을것이다. 그러한 연유로 아무튼 나는 어제 연락을 꾹 참았다는 이야기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수업이 머리속에 들어왔을리 없고 자세가 고왔을리도 없겠지만, 어차피 첫시간에 하는 이야기는 뻔할 뻔자라는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거봐, 수업도 빨리 끝났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할일이 좀 남아 있었기에 분주하게 움직이다 문득 그녀의 사진을 봤다. 어제는 안했다는 왠지 모를 죄책감에, 그게 나에게인지 그녀에게인지 확실히 모르겠지만, 아무튼 뭔가 찜찜한 기분이 싫었고 이시간에는 뭘하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그래서 답장이 오지 않을 정도의 문자를 보내기로 했다. 적당히 보내서 나의 존재만이라도, 내가 아직 여기 살아있는 존재라는것을, 당신에게 관심을 끊은게 아니라 이건 단순히 테크닉적인 문제이기에 어제는 연락을 하지 않은것에 대하여 너그러이 이해해주길 바란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이 나는 그렇게 답장이 오지 않을 문자를 보냈다. "네^^" 답장이. 어찌이리 짧고 아름답고 경쾌한지. 확인 후 시덥잖은 다른 문자들에 답문을 하고 연구실에 올라왔다. 수업중에 무음이었던 휴대전화는 그렇게 묵묵히 자기 할일을 하고있었고 그렇게 묵묵히 그녀의 또 다른 문자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것을 더욱 재빨리 알아차리지 못한 나에 대해 스스로 수많은 질타와 채찍질을 해보지만, 그 사이에 어쩔수 없이 미소가 퍼져 올라온다.
"책 좋아하세요?"
왕창 몽땅 싹 쓸어서 다 읽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책을 좋아하더라도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없고 필히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상황임을 겪어보지 않은자는 알리가 만무하지만, 이런 사소한 질문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 것임을 새삼 느끼며 다시한번 대가리를 굴린다. 보통같으면 "응 왜" 정도면 충분할 답변이겠지만 이 질문의 출처가 그 무거움에 깊이를 더해주었다. 단연코 나는 책을 좋아한다. 이건 확실한 사실이지만 나는 지금 최대한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그녀가 좋아할만한 대답을, 그게 안된다면 최소한 나의 이미지에 해를 끼치지 않을 정도의 대답이라도 해야하는 것이었다. 머리를 쮜어짜고 답장을 보냈다. 추천을 해달라는 그녀의 말에 아침공기가 상쾌해진다. 정신이 맑아진다. 햇살이 따사로워진다. 찬바람은 나를 피해가고 소음은 내 귀를 떠난지 오래다. 발걸음은 가벼우며 이 다음 목적지가 확실하게 떠오른다. 도서관.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왜 책이었을까? 만약에 내가 책을 안좋아한다고 했다면 어떻게 대답했을까? 아니면 혹시 그녀가 내가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것은 아닐까? 어떻게? 그녀가 사소하게 던진 질문에 그 파장은 점점 넓어져만 갔다. 그 파장은 물가에 닿아 깨어지고 나는 일단 도서관에 향한다. 내가 지금까지 대출한 도서 목록이 절실히 필요하다. 어떤 종류의 책을 좋아하는지라도 물어볼걸그랬다. 후회다. 하지만 오늘은 아마도 지구의 중력이 평소에 1/6정도이지 않을까 라는 연구를 해볼 정도로 몸과 마음이 가볍다. 그리고 나는 제임스 M. 케인의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를 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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