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상상을 하면서 살아간다. 아무리 현재에 골똘하여야 한다고 해도 일어날지 아닐지 모르는 수많은 상상과 걱정을 가지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제 아무리 노력을 한다해도 쏟아져나오는 생각들을 틀어막을 순 없다.
성실하고 됨됨이 나무랄데 없고 고지식하지도 않아 적당히 요령도 피울 줄 알고 가끔씩은 회사 회식자리에서 가는 업소들에 가서도 분위기 맞춰 놀줄 아는 지인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뒤에서 호박씨 깔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는 부인 말고 다른 여자가 있었다. 부인보다 더 많은 인생을 함께 허비하고 있는 우리들도 전혀 몰랐다. 충격이 컸다. 부인은 더욱 충격이 컸겠지. 꼭 이렇게 평소에는 잠잠하다가 한 방에 뒷통수를 갈기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경우는 더욱 악질적이다. 당사자는 억울하겠지만 어쩌랴. 아니라고 믿었던 사람에게 당하는 배신은 가슴을 찢어 놓는다. 복구가 불가능할만큼. 상대에게 어떠한 기대를 하게 만들었으면 어느정도는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그 집은 한마디로, 풍지박산이 났다. 집안에서만 끝난 것이 아니다. 바람을 피우던 여자도 남편이 있었고 그 여자의 남편과 지인의 부인이 회사로 찾아와 난리를 피웠고 회사의 이미지와 위신에 누를 끼친 지인에 대해서 상부는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전 세계적 상황이 그러한만큼 퇴직권고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사측의 조치였다. 분명 인생의 한 번뿐인 실수였지만 지인이 잃은 것은 너무 많았다고 생각한다. 바람 피우는 것이 잘한 일은 아니지만, 회사에서 치이고 자식들에게 치이고 마누라에게 치이다보면 본인도 행복할 권리를 찾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행복을 뺏을수도 없지만 행복을 찾아먹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아무튼 나쁜 것들 빼고 좋은 것들은 전부 다 잃은 지인과 하루정도 이야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여자친구를 만나기로 했었으나 그래서 급하게 미루게 되었다. 나는 이런 식의 약속을 조율하는 일이 어렵다. 아무튼 지인과 어디든 소주를 파는 곳에 들어가서 뭐든 시키고 소주를 주문했다. 소주잔이 비워 질수록 그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로 가득가득 차올랐다. 지인은 그렇게까지 유복하게 자라온 것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이 남들하는정도로는 맞춰주실 수 있는 분들이었다. 물론 부모님 본인들의 희생이 뒤따랐겠지만. 그렇다고 넉넉하지는 않았기에 나름 굵직한 우여곡절도 있었다. 파란만장했다,라고 생각이 들 정도는 아니었지만 분명 자신만의 말 못한 이야기들이 꽤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퇴사는 이번달 말까지 하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개인의 사랑과 업무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MBA에서는 엄격하게 교육을 시키는 것일까, 생각해보았다. 지인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위자료며 아이들 양육비며 들어갈 돈이 한두푼이 아니었고 직장도 없는 미래가 어떨지 상상해보았다. 그는 분명 행복한 삶을 상상하지는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앞으로 어떠한 것이라도 행복한 미래를 가질 것이라는 상상을 하기엔 힘들 것이었다. 그는 좌절했다. 그것이 진짜 미래에 일어날 일인지 아닌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지인과 술을 하기 전에 여자친구에게 간단히 전화를 했었다. 지인이 혼자 있기에 길게 할 수는 없었다. 조금있다 다시 전화를 주겠다고하고는 끊었는데 시간이 제법 흘러버렸다. 지인과 헤어진뒤 전화를 했는데 역시나 전화로 흘러온 목소리는 별로 좋지 않은 무드라는 것을 알게해줬다. 이유는 알겠다만 기왕이면 상황을 이해해줬으면 했던 바람도 있었기에 내 무드도 조금은 흔들렸다. 친구와 소고기를 먹었다고 했다. 술도 마셨겠지. 어떤 친구인지는 물어봤지만 이야기하지 않았다. 일부러 얘기를 안한다는 느낌도 조금 있었지만, 그래서 기분도 조금 그랬지만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어디냐고 물어봤고 내가 그쪽으로 간다고 했다. 여자친구 집 근처에서 만났지만 바닥에 깔린 냉랭함이 전해졌다. 여자친구는 남자와 저녁을 먹고 술을 마셨다고 했다. 내가 기분을 상하게 해서 홧김에 그랬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여자친구가 홧김에 아는 남자를 불러서 나는 사줄 수 없는 비싼 음식을 먹고 있는 장면을 상상하게 되었다. 건배를 하면서 술을 한 잔씩 하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한 두잔 들어가면 여자친구가 오늘 나에게 서운했던 일들을 그 남자에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상상하게 되었다. 그 남자는 어떤 연유로 그렇게 남의 여자친구와 밥을 쳐먹고 있는지는 모르나 경청하는 척 하는 모습을 상상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술을 한 잔 더 따라주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 족히 3시간이 넘는 시간을 그렇게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구체적인 장면을 상상하게 되었고 그런 상상은 실제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은채 이미 내 머리속에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내가 사줄 수도 없는 것을 어떤 남자가 사주면서 위해주는 척을하고 마음속으로 유희를 즐기고 있다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 개새끼. 어떤 새끼인지 아무리 상상해도 그것만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상상도 되지 않는 새끼때문에 기분이 나아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일종의 배신감도 느끼게 되었다. 언제든 내가 아니어도 다른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조금만 잘못을해도 다른 남자에게 오늘 저녁시간되냐는 전화를 하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파왔다. 앞으로 무슨일이 일어나건 나는 그런 상상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건 상상도 못했던 일인데 그렇게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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